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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읽는시집 46

한강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 한강시집 현대시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거리 한가운데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둥글게더 둥글게파문이 번졌을 테니까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그렇게 영원히 죽었어, 내 가슴에서 당신은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함께읽는시집 2024.10.22

한강 저녁의 대화 | 한강시집 현대시

저녁의 대화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너는 삼켜질 거야.』검고 긴 그림자가 내 목줄기에 새겨진다. 아니,나는 삼켜지지 않아. 이 운명의 체스판을오래 끌 거야,해가 지고 밤이 검고검어져 다시푸르러질 때까지 혀를 적실 거야냄새 맡을 거야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당신 귓속에 노래할 거야 나직이, 더없이,더없이 부드럽게.그 노래에 취한 당신이내 무릎에 깃들어잠들 때까지.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너는 삼켜질 거야.』검은 그림자는 검푸른 그림자검푸른그림자

함께읽는시집 2024.10.21

박목월 나무 | 청록파 서정시 자유시

나무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를 뽐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함께읽는시집 2024.10.06

정희성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현대시 짧은시 사랑시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 날 당신과 내가날과 씨로 만나서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우리들의 꿈이 만나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어느 겨울인들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함께읽는시집 2024.10.02

이병률 당신이라는 제국 | 현대시 사랑시 짧은시

당신이라는 제국  이 계절 몇 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

함께읽는시집 2024.09.12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 현대시 투쟁시 짧은시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살아오는 삶의 아픔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백묵으로 서툰 솜씨로쓴다.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

함께읽는시집 2024.09.10

이성부 벼 | 가을시 농촌시 짧은시

벼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햇살 따가워질수록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바람 한 점에도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이 넓디넓은 사랑,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이 피묻은 그리움,이 넉넉한 힘……

함께읽는시집 202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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