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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읽는시집 46

박준 유월의 독서 | 짧은시 좋은시

유월의 독서 ​그림자가먼저 달려드는산자락 아래 집에는 대낮에도불을 끄지 못하는여자가 살고 여자의 눈 밑에 난작고 새카만 점에서나도 한 일 년은 살았다 여럿이 같이 앉아울 수도 있을너른 마당이 있던 집 나는 그곳에서유월이 오도록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 침략과 주름과 유목과 노을의페이지마다 침을 묻혔다 저녁이 되면그 집의 불빛은여자의 눈 밑 점처럼 돋아나고 새로 자란 명아주 잎들 위로웃비가 내리다 가기도 했다 먼 능선 위를 나는 새들도제 눈 속 가득 찬 물기들을그 빛을 보며 말려갔겠다 책장을 덮어도눈이 자꾸 부시던유월이었다

함께읽는시집 2024.07.27

박준 가을이 겨울에게 여름이 봄에게 | 박준시 짧은시 좋은시

가을이 겨울에게 여름이 봄에게 ​철원의 겨울은 무서웠다 그 겨울보다 무서운 것은 감기였고 감기 기운이 침투할 때면 얼마 전 박이병이 공중전화 부스를 붙잡고 흘렸다는 눈물보다 더 말간 콧물이 흘렀다 누가 감기에 걸리면 감기 환자를 제외한 소대원 전체가 평생 가본 적도 없는 원산에 탄두 같은 머리를 폭격해야 했다 애써 감기를 숨기고 보초라도 나가면 빙점을 넘긴 콧물이 굳어져 코피로 변해 흘렀다 부대 앞 다방 아가씨를 본 것도 아닌데 어린 피가 흰 눈 위에 이유 없이 쏟아졌다 철원의 겨울은 무서웠지만 벙커에서 보초를 설 때면 겨울보다 여름이 더 무서웠다 가끔 박쥐들이 천장에 몰래 매달려 있었지만 우리가 무서워한 것은 벽에 스며 있는 핏자국이었다 핏자국이 점점 진해진다는 소문도 돌았고 벽에 기대 보초를 섰다가 ..

함께읽는시집 2024.07.26

김소월 풀따기 | 짧은시 좋은시

풀따기  우리 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 바닥은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내어던지 풀잎은 옅게 떠갈 제물살이 해적해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가엾은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

함께읽는시집 2024.07.25

김소월 초혼 | 좋은시 이별시 짧은시

초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함께읽는시집 2024.07.24

안미옥 여름 끝물 | 현대시

여름 끝물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중력 공간에 두 눈을 두고 온 사람처럼무엇을 보려고 해도마음만큼 볼 수 없어서 그렇게 두 손도 두 발도전부 두고 온 사람으로 있다고 한다면 쓰지 않는 시간을 겪고 있다고 한다면이해가 될까 이제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한껏 울창해져서어김없이 돌아오는 여름 불행과 고통에 대해선 웃는 얼굴로밖에 말할 수 없어서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 절반쯤 남은 물통엔 새의 날개가 녹아 있었다 걸을 때마다 여름 열매들이 발에 밟혔다언제부터 열매라는 말에 이토록 촘촘한 가시가 들어 있었을까 다정한 얼굴녹아버리는 것밟히는 것 그해의 맨 나중에 나는 것 우는 사람에겐 더 큰 눈물을 선물하고 싶다어느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게

함께읽는시집 2024.07.22

김수영 폭포 | 현대시 서정시 자유시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곧은 소리는 곧은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높이도 폭(幅)도 없이떨어진다.

함께읽는시집 2024.07.21

이상 오감도 시제 1호 | 난해시

오감도 시제 1호  13인의아해(兒亥)가도로로질주하오.(길은 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느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

함께읽는시집 20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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