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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 <그 여자네 집> 해설과 감상 | 이 한 줄의 시가 오늘의 나를 붙들었습니다

하나의책장 2025. 5. 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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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의 대표 시 「그 여자네 집」, 이 한 줄의 시가 오늘의 나를 붙들었습니다.

오늘은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함께 읽으려 합니다.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깜빡깜빡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 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버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집

 

​어느날인가

그 어느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 안 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 해설 및 주제 분석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은 하나의 공간을 통해 삶, 기억, 그리움 그리고 사랑과 죽음까지 아우르는 시입니다.

그는 특정한 집을 중심으로 유년의 감각부터 첫사랑의 정서, 공동체의 풍경을 풀어내며 공간과 존재가 겹쳐지는 깊이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복과 누적을 통해 한 편의 시가 소설처럼 느껴지는 깊이와 입체감을 선사합니다.

이 시의 핵심은 그 여자라는 존재를 둘러싼 기억의 집합입니다.

또한 시 말미에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이라는 구절은 과거의 공간이 물리적으로 사라졌지만 내면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역설합니다.

 

 

■ 하나의 감상

 

읽는 내내 한 사람의 기억 속에 담긴 집이 그려졌습니다.

꼭 함께 거닐고 있는 듯한 감정마저 들었습니다.

 

사랑과 그리움, 상실과 회한이 교차하는 그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어떤 사람의 마음 안에만 존재하는 내면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그 여자네 집을 품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요.

되돌아갈 수 없지만,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 한 사람 나아가 그 시간, 그 장소를요.

 

 

 

이 시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이 글을 공유해주세요.

오늘, 당신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엔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함께 읽어보려 합니다.

흔들려 본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단단한 위로의 목소리를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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