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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만한시집 28

박준 가을이 겨울에게 여름이 봄에게 | 박준시 짧은시 좋은시

가을이 겨울에게 여름이 봄에게 ​철원의 겨울은 무서웠다 그 겨울보다 무서운 것은 감기였고 감기 기운이 침투할 때면 얼마 전 박이병이 공중전화 부스를 붙잡고 흘렸다는 눈물보다 더 말간 콧물이 흘렀다 누가 감기에 걸리면 감기 환자를 제외한 소대원 전체가 평생 가본 적도 없는 원산에 탄두 같은 머리를 폭격해야 했다 애써 감기를 숨기고 보초라도 나가면 빙점을 넘긴 콧물이 굳어져 코피로 변해 흘렀다 부대 앞 다방 아가씨를 본 것도 아닌데 어린 피가 흰 눈 위에 이유 없이 쏟아졌다 철원의 겨울은 무서웠지만 벙커에서 보초를 설 때면 겨울보다 여름이 더 무서웠다 가끔 박쥐들이 천장에 몰래 매달려 있었지만 우리가 무서워한 것은 벽에 스며 있는 핏자국이었다 핏자국이 점점 진해진다는 소문도 돌았고 벽에 기대 보초를 섰다가 ..

함께읽는시집 2024.07.26

김소월 초혼 | 좋은시 이별시 짧은시

초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함께읽는시집 2024.07.24

간밤에 읽은 책 | 화가 앙리 마티스가 직접 편집하고 삽화를 그려낸, 악의 꽃

악의 꽃 (앙리 마티스 에디션)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문예출판사2018-11-05원제 : Les Fleurs Du Mal (1857년)시 > 외국시    인간과 바다  자유로운 인간이여, 항상 바다를 사랑하라!바다는 너의 거울, 너는 네 영혼을한없이 출렁이는 물결에 비추어 보는구나,바다처럼 한없는 네 정신 쓰라린 심연은 아닌 것을. 너는 네 모습에 심취하길 즐기고때때로 그 모습을 네 눈과 팔과 가슴으로 품으면격하고 사나운 바다의 탄식으로어느덧 네 가슴속 동요도 멎는구나. 너흰 둘 다 음흉할 만큼 치밀하구나.인간이여, 그대의 심연 바닥을 헤아린 자 아직 없고오 바다여, 네 보물 역시 아무도 모르게 감췄으니그토록 너희 둘 집요하게 비밀을 감싸는가! 그런데도 너희 둘은 아득한 옛날부터연민도 후회도 모르는 듯 서..

간밤에읽은책 2024.06.28

간밤에 읽은 책 | 창비시선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저자 신경림창비2024-03-29시 > 한국시    책 _김수영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 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단 한번..

카테고리 없음 2024.06.27

이병률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저자 이병률문학과지성사2024-04-24시 > 한국시    언젠가는 알게 될 모두의 것들  사람들은 사랑을 오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사랑을 심하게 구부러뜨리거나 질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요나는 사랑을 시작하기 시작했고개인적입니다 언제나 좋은 맛이 나는 음식을 바라지는 않아요맛이 없거나 입에 안 맞는 음식이 나올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사랑과의 잘못은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꽃을 떨어뜨린 줄기가 땅을 파고들어 열매를 맺는 것이 땅콩입니다그것을 줄기로 치느냐 뿌리로 치느냐 관점의 차이는 있습니다사랑은 계속해서 내 앞에서 헷갈려 하지만요 사랑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난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고사랑은 이성적으로 나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러기 떼의 숫자나 ..

모든도서리뷰 2024.06.01

신경림 - 장마

장마  온 집안에 퀴퀴한 돼지 비린내사무실패들이 이장집 사랑방에서중돋을 잡아 날궂이를 벌인 덕에우리 한산 인부는 헛간에 죽치고개평 돼지비계를 새우젓에 찍는다끗발나던 금광시설 요릿집 얘기 끝에음담패설로 신바람이 나다가도벌써 예니레째 비가 쏟아져담배도 전표도 바닥난 주머니작업복과 뼛속까지 스미는 곰팡내술이 얼근히 오르면 가마니짝 위에서국수내기 나이롱뻥을 치고는비닐우산으로 머리를 가리고텅 빈 공사장엘 올라가본다물 구경 나온 아낙네들은 우릴 피해녹슨 트랙터 뒤에 가 숨고그 유월에 아들을 잃은 밥집 할머니가넋을 잃고 앉아 비를 맞는 장마철서형은 바람기 있는 여편네 걱정을 하고박서방은 끝내 못 사준 딸년의살이 비치는 그 양말 타령을 늘어놓는다

좋은시와명언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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