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고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사람은, 다시 그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 책 속 밑줄
정하섭은 두 손으로 얼굴을 꼭 눌러 감싸며 신음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밤새껏 걸어 여기까지 와 있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일깨우고 있었다. 그때 구원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암호는 백두산, 한라산, 복창하시오." "백두산, 한라산." 지난밤 위원장에게 하달받은 암호가 정하섭의 가슴에 안도의 따스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암호는 곧 생명이었다. 암호의 누설은 조직의 동맥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에게 독립공작을 부여하고 암호까지 하달했다는 것은 당성을 의심하기는커녕 당성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하는 좋은 반증이었던 것이다.
스무 살 나이가 가까워질 임시부터였으니까 아들의 열 받친 행동거지는 일정(日政) 때부터 시작되어 이미 10년이 가까워 있었다. 일본인 지주한테 대항해서 소작쟁의를 벌이면서 아들은 가도가도 목마르고 허기진 소작농군의 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일반 소작쟁의도 삭신 녹아내릴 매타작에 콩밥신세가 확연한 죄로 정해진 세상에서, 일본인 지주를 상대로 한 소작쟁의가 어떤 결과를 부를지는 너무나 빤한 노릇이었다. 그것은 맨주먹으로 닛뽄도 휘두르는 순사한테 덤벼드는 것이나 진배없었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성미 급한 나방이나 다를 바 없었다. 피걸레가 되어 내던져진 아들을 업고 집으로 돌아오며 판석 영감은 제 살이 찢겨나가는 아픔에 떨며 울었고, 차라리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목숨의 구차함이 비통해서 울었다. 축 늘어진 아들을 수십 번 추슬러 업어가며 판석 영감은 피물림하듯 대대로 이어진 소작농의 비애와 운명을 씹었다. 대를 물리는 가난이라는 것처럼 무서운 죄가 없었고, 견디기 어려운 벌이 없었다. 아들은 그 죄를 타고나서 이제 철든 나이가 되면서 그 벌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순사건 이후, 산은 피로 물들었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총을 들었던 사람들.
그 총 끝에 가족이 있었고 친구가 있었고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증오가 있었다.
인민군의 빨간 완장을 찬 이도, 토벌대의 푸른 군복을 입은 이도 사실은 같은 마을, 같은 논밭을 일구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겨누었고 무엇이 옳은가보다 누가 살아남는가가 중요해졌다.
그게, 전쟁이었다.
■ 끌림의 이유
『태백산맥』은 단지 한 편의 소설이 아닙니다.
이 소설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의 이념의 충돌 속 민중의 삶과 죽음, 그 분단의 근원과 인간의 비극을 가감 없이 담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대한 증언입니다.
조정래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묻습니다.
"누가 죄인인가?"
"진짜 죽어야 했던 건 누구였는가?"
그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 시절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요?
■ 간밤의 단상
현충일을 앞두고 『태백산맥』을 꺼내 들었습니다.
양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아리랑」과 함께 숙원 사업처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오랜만에 펼친 『태백산맥』은 역시나 책장을 넘길 수록 마음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국가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요?
『태백산맥』은 그 질문을 날카롭고도 절실하게 던지는 소설입니다.
이 책은 어느 한쪽을 미화하지는 않습니다.
이념이 갈라놓은 것은 단지 진영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고 관계이며 사랑과 믿음이었습니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전쟁이 그저 총과 칼의 싸움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삶 전체를 걸고 겪어야 했던 모멸과 절망 그리고 믿음의 붕괴였다는 것을 절절히 마주하게 됩니다.
1948년 여순사건부터 6·25전쟁이 끝난 1953년까지, 『태백산맥』은 한반도 분단의 가장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겪어낸 그 시절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분단을 맞이한 민족의 운명 그리고 진영의 이름으로 찢겨나간 삶들, 그 비극의 중심에서 저자는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누가 옳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사람을 이토록 잔인하게 만들었는가?"라고.
이 책은 문학이 기록을 넘어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온전히 품고 있습니다.
비판도 많았지만, 그만큼 『태백산맥』은 이념의 금기를 정면으로 마주한 용기 있는 책이었고 그 결과 한국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작품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잊지 않기 위한 싸움이며 문학은 그 싸움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이어가는 도구라는 사실을 이 책은 다시 일깨워줍니다.
오늘, 저는 그 조용한 문장을 따라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기억하는 사람만이 진짜 내일을 쓸 수 있으니까요.
■ 건넴의 대상
현충일, 조용히 기억이라는 방식으로 애도를 전하고 싶은 분
한국전쟁과 분단을 개인의 이야기로 만나보고 싶은 분
역사를 교과서가 아닌 삶의 언어로 느끼고 싶은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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