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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읽은 책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하나의책장 2025. 3.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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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제목이 암시하듯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번역에 대한 거대한 비유다. 허먼 멜빌이 거대한 흰 고래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모비 딕』의 화자 이슈메일의 입을 빌려 그토록 방대한 서사시를 써냈듯 홍한별 번역가는 이 책의 열네 장에 걸쳐 끝내 완성되지 않을 번역에 대한 글을 책장 위에 그린다.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 절대적인 사랑이 추동한 집요하고도 아름다운 글쓰기의
저자
홍한별
출판
위고
출판일
2025.02.15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저자 홍한별

위고

2025-02-15

인문학 > 인문 에세이

외국어 > 번역

 

 

 

 

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하얀 석고상을 그리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아니, 그 선생님은 말 같은 것을 하는 분이 아니어서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에 석고상을 들고 와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미술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한숨을 토하듯 '아그리파'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게 갓 태어난 것처럼 순결하고 눈부신 하얀 머리의 이름이었다. 선생님이 말없이 내어준 과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새하얀 형체를 종이 위에 그림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날의 준비물인 스케치북과 4B 연필만을 가지고. 흰 도화지와 시커먼 연필을 가지고 어떻게 하얀 것을 그리라는 걸까. 막막했지만 흰 종이에 더듬더듬 선을 그어 형상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을 댈수록 석고상 그림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흰색을 그린다는 불능한 과제.

 

 

흰 고래는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공허다. 멜빌은 이 흰 고래를 그리려고, 연필 선을 더해 흰 고래를 그리는 대신 흰 고래를 제외한 모든 것을 그렸다. 그렇게 글자들을 새카맣게 포개어 그리고 남은 중앙의 빈 공간, 흰 여백이 바로 흰 고래다.

 

 

나는 번역을 명료하게 정의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은 없으니, 비유를 통해 비스듬하게 다가가려 한다. 내가 이 책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흰 고래를 정의하려는 이슈메일의 시도 같은 것이 될지 모른다. 이슈메일이 그랬던 것처럼,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분석하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 쓴 글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번역을 어떻게 (같은 말로) 다르게 말하고 있느냐는 이야기이자,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다.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시도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 대부분 - 저버리는 일이다. 누구나 알듯이 어떤 번역도 원문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재현하지 못한다. 역설적이지만, 나보코프가 쌓아 올린 무한한 주석의 탑은 번역이 놓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비다(나보코프가 열거한 것만 들자면 우아함, 좋은 소리, 명료함, 취향, 현대적 용례, 문법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주석의 탑이 뻗으며 여백도 손실되었다. 상상의 여지도, 모호함의 가능성도).

 

 

나도 번역이라는 일이 탐정이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탐정소설 속 탐정의 목표는 범죄가 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저질러졌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이다. 탐정이 모든 정황과 맥락을 고려해 가장 그럴듯한 한 가지 서사를 완성하듯이, 번역가도 단어들의 단서를 모아 매끈한 하나의 문장, 빈틈없는 하나의 줄거리를 만든다. 번역가는 흩어진 의미의 조각들을 이렇게 맞추어보고 저렇게 맞추어보며 도무지 옮겨지지 않는 것을 옮기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퍼즐이 풀린다. 비어 있는 한 자리에 딱 맞는 단서/단어를 끼워 맞추자 이야기가 완결된다. 이렇게 문장을 완성할 때의 희열. 결국 번역을 하는 이유는 번역이 이런 일이기 때문이다. 드물게 찾아오는 완성의 감각.

 

 

실제로 번역을 할 때는 ‘단어’를 번역(직역)하거나 ‘단어의 의미’를 번역(의역)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제3의 무언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What do you think?’ 같은 간단한 문장이 수십 가지로 번역되는 것이다. 행간을, 침묵을, 여백을 번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간에는 참 많은 것이 있다. 맥락, 어조, 정서, 분위기, 성격, 암시, 어감, 문화적 인유, 의도.

 

 

언어의 본질은 변화다. 언어는 고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샤일록이 “맹세, 맹세, 나는 하늘에 맹세했소. 내 영혼이 위증을 해야 하오?”라며 자신의 계약을 신에게 한 맹세에 동일시하며 신성시하려고 하더라도 계약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 한, 해석의 차이는 필연이다. 그 차이를 통합하고 이해하려면 자비가 필요하다.

언어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번역에서 자비 없는 축어역을 고집한다면, 어떤 불충도 허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의미와 행간의 침묵을 무시한 채 단어만 번역하려 한다면 언어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고 파괴되는 치명적 결과를 낳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어쩌면 번역은 변신?몸을 바꾸는 일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서는” 번역,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입는 번역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걱정이다. ‘나’는 말보다 내가 먼저 변신할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마치 내가 저자인 것처럼, 내가 저자라고 착각하고 마치 내 글을 쓰듯 글을 쓰게 될까 봐 두렵다는 걸까? 번역 과정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의 끈이 끊어지고, 단어가, 이야기가 변신해서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버릴까 봐, 저자를 배신하는 배신자가 될까 봐, 번역으로 원문을 손상시킬까 봐? 뻔뻔스럽게 살을 베어내고 글을 다듬으며 문학성을 지워버릴까 봐?

 

 

단어를 옮길 수도 의미를 옮길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번역가에게는, 아예 단어도 의미도 아닌 감각으로 이루어진 시를 번역하는 경험, 읽을 수 없는 시를 읽을 수 없는 시로 번역하며 언어를 창조할 자유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 아르토처럼 번역본이 원본보다 더 원본에 가까운 것이라고 선언하는 거다. 번역은 순수 언어에 더 가까워진 것이므로 사실 그 말이 맞다.

 

 

나는 잘 읽히는 번역문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러운 논리로 글을 읽게 하려고 어쩌면 나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이 개입할 때가 있다. 마치 편집자가 된 것처럼 원문에 가위를 댈 때도 있다(있는 것을 잘라내거나 없는 것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아니다. 문장을 합하거나 나누거나 문장구조를 뒤틀거나 긍정과 부정을 뒤집을 때가 있다). 그런데 번역 원고를 다듬고 고치다가 피츠제럴드처럼 진부함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철렁해진다.

 

 

번역이 아무리 자연스럽고 편안한 한국어를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번역문에는 번역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 흔적이 번역문의 미덕이 된다.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포개어지고 간섭이 일어날 때 아롱거리는 무늬가 언어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는다. 나는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을 흉내 내려 하는데 번역가를 흉내 내어 글을 쓰는 사람도 있고, 이런 교환과 충돌을 통해 언어의 가능성이 최대로 이끌어내어지기도 한다. 내가 쓰는 언어에도 지금까지 내가 읽고 번역한 무수한 글들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최초의 여성 번역이라는 문구와 함께 에밀리 윌슨의 책이 출간되었을 때, 한편에는 의심의 눈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다. (요즘 세상에) 여자가 번역했다는 게 뭐 대단한 일인가? 이미 수십 편의 번역이 있는데 왜 또 다른 번역이 필요한가? 여자의 번역이라서 의미가 있다는 말은 곧 번역가가 투명해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리고 원본에 함부로 개입해 훼손했다는 뜻이 아닌가? 요즘 말로 하면 호메로스에 ‘페미 묻힌’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위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고, 윌슨이 옮긴이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윌슨은 원문 충실성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오히려 현대의 편견이나 관념이 글에 옮겨지는 것을 경계했다. 오뒷세우스에게 장려하고 과장된 수사를 붙이고 페넬로페의 손에 필터를 먹이고 여자 노예들에게 ‘창녀’라는 오명을 덧씌운 것은 남자 번역가들이다.

 

 

에밀리 윌슨의 『오뒷세이아』 번역은 원본의 틈새에 파고들어 은폐된 모순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권위 있는 텍스트에 미세한 균열을 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근원적인 서사로 생각한 것에도, 호메로스의 위대한 작품에도 균열이 있고 여러 목소리가 섞여 있으며 순수한 하나의 목소리란 신화에 불과함을 여성의 번역이 드러낸다. 반들반들 다듬어진 표면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균열, 삶의 고통, 노예들의 비명,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눈을 돌렸던 것들이, 그럴듯하게 구성된 신화를 치웠을 때 비로소 보인다. 번역이 원문의 틈새에 깃들어 있던 목소리를 끌어낸다.

 

 

바벨탑 때문에 같은 것을 말하는 수만 가지 다른 방식이 생겼다. 우리는 그전으로 거슬러 가서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게 되고 싶은가. 서로 다른 말들의 부딪힘과 어울림, 언어를 가지고 노는 다양한 방법, 날마다 우리가 느끼고 겪는 언어의 신비한 변화,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버리고 싶은가. 살아 있는 풍부하고 섬세한 언어 없이 문화가 발전할 수 있을까. 흐릿하고 개성 없는 공용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섬밀하고 정교한 언어의 세계가 있다. 단테가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속어가 아니라 공용어이지만 죽은 언어인 라틴어로 글을 썼다면 『신곡』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이든 창작이든 우리가 쓰는 글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더 평범해지는 쪽이 아니라 더 탁월해지는 쪽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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