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백수린
- 출판
- 문학과지성사
- 출판일
- 2025.02.28
봄밤의 모든 것
저자 백수린
문학과지성사
2025-02-28
소설 > 한국소설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강사가 말했다. 강의실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비가 와 결석생이 생긴 탓도 있었지만 원래 수강생이 적은 수업이었다.
강의실엔 그녀까지 여섯 명이 앉아 있을 뿐이었는데, 모두 강사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녀는 마침내 찾아온 평화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평생 동안 장사를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그녀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아늑했고, 그건 평생교육원에서 돌아와 식탁 의자에 앉은 채 오후의 햇살이 거실 마룻바닥 위에 넓게 퍼져 있는 걸 보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평온하고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 햇빛 사이로 지난 몇 달간 그녀가 정성껏 가꾼 나리꽃의 꽃망울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꽃이 피었네."
그녀는 길을 찾기 위해 물풀을 헤치는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기억들 사이를 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빼꼼 그녀를 바라보던 앵무새, 어깨에 올려놓으면 가만히 앉아 그녀와 같이 연속극을 보며 그녀의 목에 보드라운 부리를 비비던 앵무새, 화초에 물을 주기 위해 그녀가 양동이 가득 물을 담아 뒤뚱뒤뚱 걸어가면 그 뒤를 총총총, 발소리를 내며 따라오던 작고 작은 새가 아직 그녀에게 있던 시절로. 사람들은 알까. 잠에 들면 앵무새의 그 조그마한 발이 더 따뜻해진다는 걸.
그녀의 이목구비나 실루엣, 목소리의 높낮이와 이름 같은 건 세월 속에 지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에 일렁이던 특별한 빛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는데, 그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빛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가 당신을 황홀한 듯 바라볼 때 당신의 눈동자에 비치는 그 빛. 터무니없는 열망과 불안, 기대가 뒤섞인. 지금까지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건, 그녀 옆에서 개리를 바라보던 언니의 얼굴에서도 그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니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걸으면서 언니는 큰이모를 위해 보이는 풍경을 묘사해주곤 했다고. "엄마와 여길 같이 걸었다면, 나는 이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해 애를 썼겠지. 사방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고, 온통 부드러운 흰빛이라고. 눈 위로 떨어져 내리는 햇살은 아주 연한 노란색이라고." 그렇게 묘사를 하고 나면 큰이모는 "이젠 내 차례야" 하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그리고 큰이모는 시각을 잃은 후 얻게 된 예민한 다른 감각들을 활용해 큰이모가 느끼는 풍경을 언니에게 묘사해주었다. 바람이 어제보다 부드럽고 가볍구나. 눈 때문인지 사방에서 지난여름 우리가 쪼개 먹었던 수박향이 나는구나. 까치 소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들리는구나.
"엄마가 묘사해주던 그 세계 역시 정말로 아름다웠어."
주미가 침묵을 깨고 내게 그렇게 말한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풍경이 잃었던 색깔을 되찾는 것을 보며 일출을 보지 못해 좀 아쉽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예전엔 그런 가능성에 대해 누군가가 말하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그 비둘기가 이틀간의 몸부림 끝에 자기가 떨어진 그 좁은 통로로 탈출에 성공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믿는다고. 그 비둘기가 여러 시도 끝에 정말로 날아갔을 수도 있다고.
"상처 하나 없이, 기적처럼?"
"상처 하나 없이, 기적처럼."
'간밤에읽은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밤에 읽은 책 | 성장지향성 (1) | 2025.03.06 |
---|---|
간밤에 읽은 책 | 멀고도 가까운 (1) | 2025.02.24 |
간밤에 읽은 책 | 그해 봄의 불확실성 (0) | 2025.02.23 |
간밤에 읽은 책 | 대온실 수리 보고서 (4) | 2025.02.18 |
간밤에 읽은 책 | 마흔에 읽는 인문학 필독서 50 (2) | 2025.02.13 |